2, 미국의 손짓과 거부

  2000년 여름의 어느날 고향친구 K미국으로 갔던 안해가 5년만에 귀국했다면서 집에 초대했다. 그날 나는 최근에 중국조선족들이 미국으로 많이 건너가있다는 친구 안해의 귀가 솔깃해졌다. 친구의 안해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중국조선족가운데 공직 폼을 잡고 여유 있게 던 사람, 공장이 문을 닫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건너간 사람,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 지어 소장사군마저 있다면서 왜 기자인 김선생은 미국에 대해 관심이 없느냐고 반문했. 나는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

그때까지 미국 나와 아무런 인연 없는 나라, 그렇고 그런 나라 기억되여있었. 그러 미국에 있는 중국조선족에 대한 친구 안해의 이야기 듣고 또 뉴욕 재미교포 필복덕할머니를 알게 된후부터 멀고 낯선 미국은 언젠가부터 뜨겁게 사랑을 나눠온 인처럼 성큼 나의 앞에 다가왔다. 나는 미국에 심을 갖고 사랑하게 되였. 매일 동료들과 함께 직장 일에 충실하는 한편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미국에 갈 기회가 오기 기다렸다. 오래동안 우리의 적대국으로 멀리 밀려났던 미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문화문명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면 나의 기자인생이 너무나 억울하고 비참할것 같았다. 허드선강가에 우뚝 서있는 자유녀신상, 아득히 뻗은 고속도로에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차량들, 나무숲에 깊이 묻힌 마을에 들어와 여유작작 노닌다는 사슴들이 인간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을 직접 렌즈에 담고싶은 욕망이 시도 때도 없이 굴뚝 같이 치솟았다. 미국을 알고싶은 마음을 더는 억제할수 없어 2000년 말에 사사 미국관광을 시도했다. 그런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나에게 맡겼기에 치밀하게 계획했던 미국관광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꿈이 있으면 해몽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미국 뉴욕의 필복덕할머니께서 열심히 나의 미국방문을 기도해준 덕분일가. 2002 6 18일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부터 문득 초청장이 날개 돋친듯 날아왔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미국동남부분회 림창현선생이 친구의 소개로 워싱톤에서 개최는 문학심포지엄에 나를 초대했다. 그러나 초청장 손에 쥐고도 나는 미국방문의 성사여부를 처음부터 반신반의했다. 미국사증을 받기가 초청장을 받기보다 훨씬 어렵다는것을 진작부터 알고있었. 나는 미국으로 가려다가 괜히 도중에 랑패만 볼것 같아서 사증신청을 포기하려고 했다. 한동안 주저하다가 미국에 가지 못하더라도 미국대사관에는 들어가볼수 있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고 한번 시험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6 19일 나는 조기가 바람에 위엄있게 펄럭이는 심양주재 미국령사관에 도착했다. 오전 9시에 예약된 순서대로 나는 령사관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나의 앞에 20여명이 사람들이 사증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초조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령사관 일군이 사증을 받으러 온 사람과 마주앉아 면담하는 말소리가 스피카를 통해 울려왔다. 소문 대로 사증을 받는 사람보다 퇴자를 맞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매번 면접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 면접을 보는 령사관 관원이 바뀌였다. 나의 차례가 될 무렵 거쿨진 흑인청년이 창구안에서 어슬렁거리며 나를 내다보고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흑인청년이 싫었다. 검은 피부로 반들반들하게 포장된 흑인청년의 몸에서 인정과 너그러움을 찾아볼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의 운수를 탓하며 흑인청년의 까만 눈이 빛나는 창구에 축 처진 모습으로 다가섰다. 처음부터 사증을 받을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은때문일가. 나의 마음이 갑자기 이상하게 평온해졌다. 흑인청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류창한 중국말이 흑인청년의 하얀 이 사이로 친근하게 튕겨나왔다.

미국에는 왜 갑니까?”

나는 사실 그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국제펜클럽 미국동방부의 초청으로 문학세미나에 참가하러 갑니다.”

현재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있는건가요?”

텔레비죤방송국 기자 겸 사회자입니다.”

대화는 의외로 따분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것 같아 너무 편안했다.

기자사업에 종사한지 몇년 되였습니까?”

“8년 되였습니다.”

아이는 몇살입니까?”

고중 1학년에 다니는데 18살입니다.”

흑인청년은 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몸을 자세히 빗질했다. 이번에는 웬 일인지 흑인청년의 눈길이 싫지 않았다. 그의 까맣고 윤기나는 얼굴에 상냥한 미소와 자상함이 어려있었다.

미국의 초청서를 볼수 있습니까?”

여기에 있습니다.”

흑인청년은 초청장을 한참 훑어보았다.

당신의 신분을 밝힐수 있는 서류를 봅시다.”

나는 준비해온 서류를 내놓았다. 그러나 흑인청년은 서류를 보지 않았다. 그는 나와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최영원이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사회하면서 찍은 사진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모았. 그러다가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당신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당신의 프로를 소개할수 있습니까?” 라고 . 이 프로는 사회인들로부터 모금하여 곤난한 애들을 공부시키는것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기자사업에 몇년 종사했다구요?”  “8년 종사했습니다.”  기자증을 볼수 있습니까?”

나는 기자증을 꺼내 보였다. 흑인청년은 나의 서류에 동그라미를 긋고나서 활발한 필치로 사인했다. 나는 예측했던대로 퇴자를 맞은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흑인청년이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축하합니다당신에게 비자를 발급하겠습니다. 오후 3시에 다시 와서 려권을 찾아가세요.”   감사합니다.”

너무나 뜻밖이여서 한동어리벙벙해졌다. 나는 부자연스럽게 꾸벅 허리 굽혀 인하고 무엇에 쫓기듯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그 흑인청년을 뒤돌아보았다. 서류더미에 머리를 묻고 일에 몰두하는 흑인청년 얼굴이 더는 검게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오니 초여름의 해살이 부드럽게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령사관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방금 있었던 꿈 같은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로 그때부터 긴장해났다. 온몸을 엄습하는 긴장을 토해내기 위해 몇번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몇십년간 무정하게 닫혀있던 미국의 문이 나를 향해 드디여 활짝 열렸다!

나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미국령사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을 남겼다.

721, 나는 미국행을 위해 사랑하는 연길을 떠났다. 8년간 어깨 겯고 열심히 일하던 동료들친자식처럼 아끼던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그램을 뒤로 하고그리고 안해와 아들도 흐릿한 나의 시야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2002 8 1 12, 대한항공 747 려객기는 미국 워싱톤으로 가는 손님을 싣고 김포공항에서 리륙했다, 비행기가 공중에 높이 날아서야 나는 지금 미국으로 가고있다는을 실감했다. 려객기는 미국시간으로 12 35분에 워싱톤 DC공항에 착륙했다. 한국에서 81일에 출발했는데 나를 맞이한 미국은 역시 81일이였다. 시차때문에 하루를 더 번셈이였다. “9.11”테러 1주년이 막 다가오는때여서인지 워싱톤공항은 경계가 삼엄했다. 전신무장을 한 경찰들이 굳어진 표정으로 입국절차를 밟고있는 사람들을 주의 깊은 시선으로 시했다. 그들의 몸에서 풍겨오는 차가운 분위기때문인지 바닥에 땀 났다.

입국절차를 밟는 정에 나는 그물에 걸려들고말았다. 입국수속에 문제가 있다면서 다른 몇사람들과 함께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영어 한마디도 모르는 나는 긴장하여 눈앞이 캄캄했다. 그들은 우리를 사무실에 방치한채 한동안 자기 일만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떠날 때 영어와 한국어로 된 가이드 회화수첩을 샀기에 나는 화장실에 다녀올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장실에 가고싶다는 구절을 가리키니 한 직원이 웃으면서 화장실로 안내했다. 그들은 자기 할 일을 다한후에야 우리가 생각난듯이 거만하게 손짓했다. 그들을 따라 간 공항내 이민국사무실에는 우리 일행외에도 아랍사람들과 흑인 여러 명이 와있었다. 한 직원이 영어를 아는가고 물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때 영어를 잘하는 한국청년이 구세주마냥 앞에 문득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한국청년은 나에게서 사실의 경과를 대충 듣고 류창한 영어로 한 직원과 이야기했다. 한국청년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돌아갈 때의 비행기표에 귀국 날자와 시간을 밝히지 않습니까?”

나는 한국청년에게 회의 주최측에서 행사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기에 돌아가는 시간을 결정하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한국청년이 동시통역을 했는데도 납득되지 않는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일이 쉽게 풀릴것 같지 않았다.

얼마후 한국청년이 나에게 불법체류동기가 있다고 의심한다고 . 정말 답답한 일이였다. 마음같아서는 미국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당장 귀국하고싶었다. 이때 직원이 한국청년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한국청년은 나의 초청장을 보련다고 했다. 나는 초청장과 함께 워싱톤의 림창현선생의 명함장도 함께 내밀었다. 나는 한국청년에게 함께 온 한국사람들과 우리를 초청한 회의 주최측분들도 밖에서 기다리고있다고 말했다. 한국청년의 통역을 듣고있던 직원은 림창현선생의 명함을 보면서 전화했다. 핸드폰에서 림창현선생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숙이고 한동안 말없이 듣고있던 직원은 그제야 알겠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압수했던 려권을 돌려주며 인츰 통과시켰다.

밖으로 나오니 서울에서 함께 온 한국사람들과 림창현선생 일행이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나는 림창현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우리가 그물에 걸려든 리유를 알게 되였다. 그들이 우리의 초청장에 밝혀진 펜클럽이라는 을 몰라 그런 무리를 저질렀다. “펜클그 어떤 국제테러조직으로 오해하고있더라는 림창현선생의 말에 우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이민국사람들이 그 정도의 수준인가고 하자 림창현선생은 미국사람들가운데 무식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8 3일에 나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미동부지역위원회 창립기념회 및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문학창작에 뜻을 둔 많은 재미교포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림창현선생 부부가 주최한 행사는 미국사회에서 외롭게 한글로 문학창작을 하는 재미동포들의 열정과 의지를 잘 보여주었다. 심포지엄이 끝난후 우리는 워싱톤시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나이아가라폭포 등 명소들 관광했다. 양을 모는 한 목동에 의해 발견되였다는 나아가라폭포는 그동안 미국의 세관을 통과하느라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나의 넋을 송두리채 아사갔다. 나는 미국의 근대문명보다 대자연의 신비에 감탄했다. 나이아가라폭포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장엄하다아름답다는 말의 무색함과 빈약함을 느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본후 우리 일행은 카나다쪽에 볼거리가 더 많다며 끼리끼리 패를 지어 건너갔다. 그러나 누구나 자유롭게 넘나드는 카나다 국경도 중국에서 온 두 사람에게만은 린색했다. 중국려권을 가지고 카나다에 가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올수 없다는 누군가의 귀띔에 우리는 걸음을 춤했다.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우리 일행은 어느덧 카나다쪽으로 거의 다 가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에서 온 우리 둘만이 무리를 잃은 외기러기처럼 외롭게 남을수밖에 없었다. 아니, 고아처럼 버림을 받았다. 중국공민으로서 어쩔수 없이 받게 되는 차별이였다.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순순히 귀국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미국을 알고싶었던 욕망이 더 커졌다. 어쩌면 내가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미국이 나를 놓아주지 않은것 같았다. 고추장 맛보듯 미국문화를 잠간 접하고 빈손으로 귀국하고싶지 않았다.

나이아가라폭포관광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우리는 맨하탄 서울가든이라는 한식관에서 식사했다. 그때 마침 뉴욕에 계시는 필복덕할머니의 둘째아들 박석록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박석록선생은 1998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다녀갔기에 형님 동생 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맨하탄에서 7번 지하철을 타고 나는 82가에서 내렸다. 련락을 받은 필복덕할머니께서 지하철입구에까지 나와 나를 기다렸다. 필복덕할머니께서는 나를 미국으로 오게 해달라고 십여년 동안 하느님께 기도했다면서 반갑게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목이 꽉 메 할 말을 잃었다. 필복덕할머에게 어떻게 감사를 드렸으면 좋을지 몰랐다. 필복덕할머니께서는 부부 동반으로 함께 왔으면 좋았으련만 나 혼자 왔다면서 몹시 섭섭해하셨다. 사실 필복덕할머니께서는 나보다 안해가 미국으로 오기를 더 간절히 바랐다. 이튿날 나는 맨하탄에 있는 세방려행사에 가서 280달러를 지불하고 미국체류연장신청을 했다. 그런데 며칠후 이민국으로부터 미국체류연장을 거절한다는 통지가 무정하게 날아왔다. 체류연장 리유가 불충분하다는것이였다. 나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글을 써서 중국에 미국문화를 알리고싶다는 리유를 더 곁들여서 다시 미국체류신청을 했. 하지만 그후 어떤 답복이 왔는지 나도 모른다.

나는 계획대로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미국문화를 체감하고 미국풍토를 습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불법체류자의 행렬에 들어선것이다. 낯선 미국땅에서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치렬하게 생존경쟁을 하는 한 불법시민으로 조용히 길들여졌다. 힘든 불법체류자의 삶을 5년 동안 살면서 외롭지 않았던것은 수십만명을 헤아리는 불법체류자들이 지금 이 시각도 미을 파도처럼 휩쓸고있기때문이다. 붉은 신호등이 켜진 거리도 여럿이 함께 건무섭지 않다는 일본의 속담처럼 수십만명 불법체류자들이 뿜는 입김과 숨소리가 나를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떠밀어준 힘이였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의 원주민은 지금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인디안인들이였다. 인디안인들의 땅이 오늘 미국인들의 땅으로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총칼을 들고 무력으로 인디안인들의 땅을 강점했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미국에서 살아가는 미국 국민 모두가 불법체류자라고 할수도 있지 않을가?! 그 불법체류자들속에서 나의 불법체류자 삶을 조용히 살았을뿐이다. 오늘 이 글을 독자들앞에 내놓을수 있게 된것도 불법체류의 삶이 밑거름이 되였기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보다는 그러한 삶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것이 나의 변함없는 인생철학이다. 나는 5년 남짓 불법체류자의 삶을 살면서 매일 미국의 근대문명과 전통문화를 생각하며 그 모든것을 습득했다는 점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